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Ep.6
회사에 순수한 호의는 없는 것일까.

2019년 회사에 변화가 많았다.
그 중 하나는 자율 좌석제로, 지정된 자리가 아니라 어느 곳이든 원하는 자리에 앉는 것인데, 그룹 내 타사들과도 섞여 앉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본인이 익숙한 구역 내 앉는 편이고, 자주 마주치니 모르던 타사 구성원의 얼굴을 대략 알게되기도 했다.
Ep. 6-1
2019년 8월, 내가 주로 앉는 곳에 앉는 우리 회사 i대리 1명, 타사 대리1명, 타사 J팀장 1명이 있었다.
자주 마주치며 친분이 생겼고 어느날 J팀장이 식사를 제안했다. 점심이라 생각해 흔쾌히 수락했으나, J팀장은 저녁에 맥주 한잔 간단하게 먹자고 했다. 물론 부담스러워 중간에 점심으로 바꾸려했지만, J팀장의 계속된 권유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타사 대리 1명은 개인 스케줄을 이유로 거절했고, J팀장, 우리 회사 i대리, 나 이렇게 세명이 만나기로 했다.
식사 장소를 정하면서도 불편했다.
나와 i대리가 회사 근처 식당으로 제안했으나 J팀장은 굳이 젊은 분위기의 이태원으로 가자했다. i대리와 나는 비교적 핫한 분위기의 멀지 않은 다른 곳을 찾아 겨우 설득했다.
원탁에 J팀장-나-i대리 순으로 둘러 앉았고, 식사 중 J 팀장은 지속적으로 나에게 스킨쉽을 했다.
팔뚝을 움켜잡거나, 신체 왼쪽 부의를 허벅지까지 쓸며 만지거나, 손목을 잡았고, 화장실을 오갈 때는 i대리의 어깨를 만지거나 팔뚝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식사 중간 J팀장이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i대리가 나에게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고, 나는 '너무 불편하니 얼른 마무리 하고 가자'고 대답했다.
스킨쉽 외 대화 주제 역시 불쾌했다.
J팀장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미국 여자가 본인을 유혹한 이야기를 했다. '가슴골과 같이 엉덩이에도 골이 있잖아? 엉덩이 골을 다 보여주면서 문신에 대해 설명했다' 라며 적나라한 표현을 해 듣기 거북했다.
식사자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즘, J팀장은 술을 더 시키려고 했고 또 2차를 가자고 했다.
너무 늦었다고 거절했지만, J팀장은 i대리 손을 잡으며 '30분만, 1시간만, i대리 노래 들으러 가자'고 했다. 내가 맞잡은 손을 떨어뜨려 놓으며 거절해으나, J팀장은 'i대리 노래 듣고 싶다, 잘 할 것 같다'고 지속적으로 제안했다.
나와 i대리는 제안을 끝까지 거절하고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 i대리,J팀장의 집 방향은 모두 달랐고, 술도 별로 안 마신지라 각자 버스 혹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되었다.
J팀장은 i대리에게 조심해서 가라고 인사한 뒤,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i대리가 가고 난 후, 여러 차례 J팀장에게 가는 방향이 다르다고 이야기 했으나, 기어코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왔고 은근히 2차 갈 것을 권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갑작스레 소나기가 왔고, 비를 가려주는 핑계로 머리 팔뚝 등을 만지며 내게 더 다가왔다.
곧 내가 타고 가는 버스가 왔고 먼저 가겠다고 뿌리치듯 달려 버스를 타는데, J팀장도 뛰어 따라탔다.
버스에 올라서며 J팀장은 내 오른쪽 골반과 엉덩이 부분을 잡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J팀장에게 (J팀장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과 가까운) 다른 정류장에서 내릴 것을 권했으나,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겠다 우겨 기어코 나와 같이 내렸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이 아파트 바로 앞이라, '먼저 들어가겠다'고 이야기 한 뒤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너무 무서웠고, 도착한 후에야 안심이 되면서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화장실 간 사이 J팀장은 i대리에게 i대리와 내 집이 어딘지 물어봐 대략 알려주었다고 한다. J팀장은 미리 알고 어떻게 할지 생각했던건 아닐까.
앞서 H팀장과의 일 이후, 내가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계속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에 이번 일은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내 감정, 심리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성희롱, 성추행으로 인한 불안정한 마음, 내 집 위치를 알고 있어 생겨난 공포감, 회사에서 마주치는 두려움 등.
i대리의 의견도 듣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어 사내 성희롱/성추행 관련 담당자에게 상담 신청을 했다.
사내 성희롱/성추행 사건 관련하여 내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심리치료를 위한 상담만 할 것인지 혹은 상담과 동시에 공론화하여 J팀장에 대한 처벌도 함께 진행할 것인지.
처벌을 진행할 시 보복과 사내 소문에 대한 걱정이 있었고, 상담만 진행할 시 다시 마주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고민을 하는 중에 엘레베이터에서 J팀장과 마주쳤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왔고, 그 날 처벌을 결심했다.
상담사께 철저한 보안과 보복 금지 약속을 부탁했고, 최소한 H팀장 근무지를 옮겨서라도 나와 마주치지만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J팀장의 인사위원회가 열리기 전, 저녁 식사를 했던 음식점 CCTV를 확인했고, 같이 탔던 버스는 CCTV가 삭제되어 신용카드 교통비 사용 내역을 확인하는 등 수일이 걸렸다. 결론은 J팀장이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른 구성원들이 H팀장 관련 이야기를 쑥덕쑥덕 하기 시작했고, 흘러흘러 나도 듣게 되었는데 이상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다시는 안 본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Ep. 6-2
J팀장 인사위원회가 열리기 전 찝찝한 일이 또 있었다.
타사와의 일이다 보니 우리 회사 HR팀장이 내가 속한 조직의 임원에게 내게 일어난 성추행 사건을 보고했다.
나와 사전 상의가 없이 보고를 하기로 결정한 후에 소식을 들었고,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임원실 쪽으로 급히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걱정은 이미 진행 완료 상태였다.
HR의 임원 보고에 당시 내 팀장인 H팀장이 함께 들어간 것이다. 나는 당시 내 팀장이자 성추행(Ep.5)을 했던 H팀장이 알게 되는 것이 싫었고 그 이후가 걱정되었다.
H팀장의 성희롱/성추행 일이 얼마 되지도 않아, J팀장과의 이런 일이 또 생겼고 이를 공론화했으니 H팀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H팀장은 임원실에서 나오며 나를 한참 바라보았는데, 그 때 H팀장의 눈빛이 참 기분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