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사람들/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Ep.5

워킹맘김대리 2020. 12. 12. 11:41

사과하세요. 똑바로.

@ 겨울 밤 남산

Ep. 5-1

2019년 6월 여름으로 넘어갈 즘, 홍보팀과 회식을 했다.
남초인 우리 회사에서 보기드물게 홍보팀은 전부 여자였고, 그 회식 자리에 남자는 우리팀 H팀장과 과장 한 명 뿐이었다.
H팀장은 1차 자리부터 '꽃 밭 안에 앉아 기운이 난다', '홍보는 외모보고 뽑나? 거기 가면 일 할 맛 나겠다' 등 얼평+성희롱 발언을 했다. 1차는 시작에 불과했다.

2차는 카페로 갔다. 문제는 그 곳이 술도 파는 카페였다. 결국 원래 먹으려고 했던 빙수, 디저트 외 좀 독한 소주류를 추가로 시켜 또 술을 마셨다. 그 쯤 이었던 것 같다.
H팀장은 완전 취했다. 제법 떨어져있던 홍보팀 여성 구성원들의 손을 붙잡으며 이야기 했고, 어떤 이의 손은 쓰다듬고 또 어떤이의 팔을 쓰러내렸다. 그러던 중 H팀장은 오른쪽에 앉은 내 허벅지에 손을 얹고, 내게 기대기도 했다.

2차가 끝나고 이어서 3차를 또 가자는 H팀장을 집으로 보내려 우리팀 구성원들은 한참을 애썼다.
H팀장은 팀 막내 여자 구성원에게 팔짱끼고 어깨동무를 하며 걷다, 내 어깨를 붙잡고 또 기대려했다. 다행히 우리 팀 과장과 부장이 막아주었다.
몸도 잘 못 가누면서 계속 3차 가자고 이야기하던 H팀장을 데리고, 팀장 외 유일한 남자였던 우리팀 과장이 택시에 태워갔다.
다음날 들어보니 (만취상태에 3차가자고 조르는) H팀장을 택시에 태우기부터 집에 가기까지 아주 힘겨웠다고 한다.

H팀장과 과장이 가고 나니 남은 이들은 모두 여자였다.
남은 사람들끼리 잠깐 이야기나 하고 가자며 자리를 옮겼다. 맥주 한 잔 씩 시켜 다 마시지도 않고 이야기만 잠깐 하다 집으로 갔다.
중간에 H팀장 이야기가 나왔다. 'H팀장님, 많이 취한 것 맞죠?' '그 팀장님 취하면 안 되겠더라'...

아주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왔는데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이고 고민했다.
다음 날 H팀장을 봤는데 인사가 자연스레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좋은 방법이 아니었으나) 고민에 고민을 하다 H팀장과 따로 만나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기분이 상했다고 차분하게 이야기 했다. H팀장은 곧 '술이 문제다며, 미안하다.'라고 사과 했다. 그리고 H팀장은 스킨쉽을 했던 다른 이들에게도 사과했다며 내게 알려왔다. 찝찝했다.

그 날 저녁 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먼저 '술이 문제다'라고 핑계를 댄 것.
그리고 나에게 미안함을 담은 사과가 아니라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사과라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후, 일년간 H팀장 산하에서 불편하게 일하며 성희롱/성차별적 발언을 종종 들었다.

@겨울 밤 남산

Ep. 5-2

같은 해 8월, 우리 팀 여자 대리에게 성희롱 발언을 한 일도 있었다.

H팀장이 우리 팀 대리의 휴대폰 배경화면이 야하다며 지난 번에도 말했는데 왜 바꾸지 않냐고 물었다. 몸매가 좋은 모델의 실루엣 사진이었는데, 몇 일 전 팀 점심시간에도 H팀장은 동일한 말을 했었다.
그 대리는 겸연쩍게 웃고 어색하게 넘어가려 했으나, H팀장은 '차라리 더 야한 사진으로 바꾸라'며 웃으면서 말했다.
곧 내 휴대폰의 배경화면을 가리키며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야해야한다'고 했다. 당시 내 휴대폰 배경화면은 우리집 강아지가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사진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휴대폰 배경화면을 기본 화면으로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본 H팀장은 '어디가서 친구들이랑 사람들한테 우리 팀장이 뭐라해서 폰 배경화면 바꿨다 그런 소리 하지말라'며 웃으면서 갔다. 마지막 그 한 마디 역시 본인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성희롱/성차별적 발언들을 들어가며, 한 해 동안 H팀장 산하에서 일했다.
이 후 H팀장은 나에게 일어난 또 다른 성추행 사건에 연관되기도 했다. 그는 내게 사과했으니 괜찮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계속 불편한 관계 속에 일 해야했다. 팀장이 바뀌는 그 날까지 정말 힘들었다.

H팀장은 능력을 인정받고 또 다른 팀의 팀장이 되어 자주 마주쳤다.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5-600명이 넘어가는 시기에도 꾸준히 회식을 하던 그는 그 해 임원이 되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신규확진자 1000명이 넘을 때도 임원승진 축하 회식을 했다고 한다. )